후안 로만 리켈메(Juan Román Riquelme)는 축구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클래식 10번’의 상징입니다. 마치 체스를 두듯 경기장을 읽는 그의 플레이는 예술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현대 축구의 빠르고 압박 중심적인 전술 흐름에서는 리켈메와 같은 스타일을 이제는 보기가 어렵습니다. 리켈메의 커리어, 플레이 스타일, 그리고 왜 리켈메의 플레이가 현대 축구에서는 어려운지 플레이의 한계까지 다뤄보겠습니다.
리켈메의 커리어
후안 로만 리켈메는 1978년 6월 24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축구공 하나로 골목을 지배했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감각을 보였고, 1996년 아르헨티나의 전통 명문 보카 주니어스에서 프로 데뷔합니다. 데뷔 초기부터 시야, 볼 컨트롤, 킥 정확도로 주목받으며 빠르게 주전으로 자리 잡았고, 2000년대 초반에는 보카의 핵심 플레이메이커로 팀의 리베르타도레스 우승과 인터콘티넨탈컵 우승을 이끄는 등 ‘남미 최고 미드필더’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이후 스페인의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했지만, 당시 팀을 이끌던 루이스 반 할 감독과 전술적 갈등으로 주전 자리를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곧 비야레알로 임대 이적하면서 다시금 부활에 성공합니다. 그는 비야레알을 UEFA 챔피언스리그 4강까지 끌어올리는 대활약을 펼치며 유럽 무대에서도 자신의 클래스를 입증했습니다. 국가대표로서도 2006년 독일 월드컵, 2007년 코파 아메리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등 굵직한 대회에 참가하며 아르헨티나를 대표했습니다. 특히 2008년 올림픽에서는 리오넬 메시, 앙헬 디 마리아 등 젊은 스타들과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리켈메의 플레이 스타일
리켈메는 "경기장에서 가장 느리게 뛰는 선수"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그 느림 속에는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천재적인 통찰력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는 볼을 잡고 한 박자 멈춘 뒤, 상대 수비의 시선을 끌고 찰나의 순간에 기막힌 패스를 찔러주는 ‘정적 속의 창조자’였습니다. 시야는 마치 위에서 경기를 내려다보는 듯했고, 패스는 종이 한 장 차이의 공간을 찔러 넣을 정도로 정밀했습니다. 특히 3선에서 공격수와 연결하는 전진 패스, 혹은 빠른 리턴 패스를 활용한 공간 창출 능력은 당시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세트피스 스페셜리스트로도 유명했습니다. 프리킥, 코너킥 모두 직접 차며 많은 득점 기회를 만들어냈습니다. 그의 킥 하나로 경기의 흐름이 바뀌곤 했죠. 리켈메는 수비형 미드필더와 공격수 사이의 ‘허리’에서 경기를 조율하며, 팀 전체의 공격 흐름을 설계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 역할을 했습니다. 리켈메가 공을 잡으면 보카도, 비야레알도, 아르헨티나도 살아났습니다.
현대 축구에서 리켈메 플레이의 한계
리켈메의 플레이는 예술적이지만, 현대 축구의 흐름과는 거리가 있는 스타일입니다.
강한 압박의 시대
오늘날 축구는 전방 압박이 기본 전술이 되었습니다. 공격수부터 상대 빌드업을 저지하는 '하이프레스 시스템' 속에서는 공을 오래 소유하거나 여유를 부릴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리켈메처럼 한 박자 쉬며 전개하는 스타일은 압박에 쉽게 갇힐 수 있습니다.
피지컬과 활동량의 중요성
미드필더는 공격뿐만 아니라 수비, 압박, 커버, 리커버리 모두를 요구받습니다. 리켈메는 수비 가담이나 전력질주보다는 경기 흐름을 읽고 기술로 돌파하는 타입이었기에 현대 팀 시스템에서는 부담이 되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멀티플레이어 중심 전술
요즘 팀은 유동적인 전술과 포지션 변경을 중시합니다. 공격형 미드필더도 측면으로 빠지거나 수비까지 커버하는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죠. 하지만 리켈메는 ‘클래식 넘버 10’에 최적화된 단일 포지션 선수로, 현대 전술의 요구와는 맞지 않습니다.
빠른 전환 속도에의 한계
현대 축구는 템포가 매우 빠르며, 공격 전환 시 몇 초 만에 슈팅까지 가는 구조입니다. 반면 리켈메는 공을 받았을 때 템포를 늦추고 전개하는 플레이를 선호했으며, 빠른 역습 상황에서 다소 느린 리듬은 단점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데이터 중심의 효율성 평가
오늘날 선수 평가는 패스 성공률, 압박 저항 수치, 90분당 기여도 등 ‘수치 기반의 효율성’으로 이루어집니다. 리켈메처럼 감각적이고 창의적인 플레이는 수치로 환산되기 어렵기 때문에, 팀 전술적 가치보다 낮게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리켈메는 축구를 숫자나 기록이 아닌, 감성으로 느끼게 했던 선수였습니다. 그가 보여준 창조적이고 시적인 플레이는 축구팬들에겐 하나의 예술이었고, 그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에겐 향수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리켈메처럼 경기를 ‘지휘’하는 미드필더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대신 빠르게 뛰고, 압박하고, 유연하게 움직이는 다기능형 미드필더가 대세죠. 하지만 그렇기에 리켈메 같은 선수의 존재는 더욱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그는 "빠르지 않아도 축구는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현대 축구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의 가치를 낮게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축구가 기술과 감성, 창의성의 스포츠임을 증명해 낸 대표적인 레전드입니다.